휴지

“휴지를 다오…” 늦은 오후 다방에서 나는 생각했다.

urashimayuuki

나는 일본어로 “준킷사(純喫茶)”라고 불리는 찻집 애호가다. 일본 한국 할 것 없이 요즘은 뉴욕스타일의 세련된 카페들이 카페스타그램이니 뭐니 하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지만, 내가 특히 사랑하는 것은 쇼와(昭和) 향기 넘치는 이른바 “다방”이다. 한국에서는 다방 하면 날계란을 떨어뜨린 쌍화차지만 일본에는 뭐니뭐니해도 “나폴리탄”이 최고다. 그날도 나는 오사카 난바거리에 있는 다방 “아메리칸”에서 나폴리탄을 먹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파스타 종류 중에서도 유독 나폴리탄이라는 녀석은 입가 염색력이 뛰어나다. 쉽게 말해 입 주변이 금방 지저분해진다. 그래서 입을 닦으려고 식탁 위에 시선을 떨어뜨린 순간… 난 깨달았다.
“휴지가 없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나폴리탄을 가져왔을 때 포크 밑에 깔려 있던 얇디 얇은 냅킨 단 한장. 그것도 입가를 막 닦기에 도저히 적합하지 않은 “좋은 것”뿐이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그 따위 고급품이 아니다. 있는 집 아가씨가 사회공부 한답시고 나폴리탄인가 뭔가 하는 서민 음식을 난생 처음 먹고 앵두 같은 입술을 “호호호”하면서 우아하게 닦는 그 따위 것이 아니다. 입주변을 사내답게 마구마구 비빌 수 있는 무언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식당에 있는 휴지를 달라!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간절히 바랐다.

한국 식당은 휴지 천국이다. 빨간 색을 띤 음식이 많아서인지 일단 손이 닿는 곳에 대량의 휴지가 늘 배치되어 있다. 손님은 입술이 더러워졌다 싶으면 바로바로 휴지를 뽑고서는 입을 닦고 그 휴지를 식탁 위에 그냥 던진다. 그래서 식사를 마친 후 식탁 위에는 다 먹은 음식, 먹다 남은 음식, 그리고 대량의 휴지 조각들이 뒤섞여서 미관상으로는 도저히 예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상황이 “아이고 잘 먹었네 잘 먹었어” 하는 손님의 만족스러운 마음을 무엇보다 웅변해 준다.

최근에는 보기가 어려워졌지만 한 십년 전에만 해도 테이블 위에 두루마리휴지가 턱하니 놓여 있어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여행객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떡볶이 포장마차 같은 곳에 가면 화장실에 있는 형태 그대로 걸려져 있어 손님이 그것을 쓰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평소에 화장실에서 어떤 손짓을 하는지 노골적으로 알려 주기도 했다.

일본인에게 두로마 리휴지는 어디까지나 엉덩이를 닦기 위한 것으로 감히 그것을 신성한 식탁 위에 놓다니 웬일인가! 하는 거부감이 들어서 그런 거라 생각하는데, 우선 “토일렛 페이퍼”라는 일본식 호칭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거부감이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쓰다 보면 그렇게 실용적인 것도 없다. 일단 자기가 원할 때 원하는만큼 마음껏 입을 닦을 수 있다는 쾌감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그 쾌감을 널리 조국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 다음에 기회를 노려서 “다방 아메리칸”의 모든 테이블 위에 두루마리휴지를 놓고 다니는 휴지 테러를 감행해 볼까 하고 입가를 토마토케첩으로 붉게 물들인 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