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KCCORI通信 Vol.196 http://www.chekccori.tokyo/

＜86년생, 김지영입니다＞

♯7　여행을 준비하는 ISFJ의 자세

핸드폰을 켜고 메모장을 연다. 익숙한 화면 위에 찬찬히, 그리고 꼼꼼하게 챙겨야 할 짐 목록을 적어 내려간다. 속옷 몇 장, 양말 몇 켤레, 충전기와 멀티 어댑터, 그리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챙기는 약 봉지까지. 손끝으로 목록을 따라가며 머릿속에서는 집을 나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천천히 거슬러 걷는다. 혹시라도 하나쯤 놓치지는 않았을까. 그런 불안이 고개를 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목록을 훑는다. 어느 ISFJ의 여행 준비는 이렇게 시작된다.

짐 리스트가 얼추 완성되면, 이번엔 가야 할 곳과 가고 싶은 곳을 메모장에 추가한다. 이왕이면 맛집도 가보고 싶다. 네이버 지도 어플 위 익숙한 이름의 동네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종로, 대학로, 홍대, 성수. 익숙한 이름 아래 우후죽순 생겨난 건물들은 더 이상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니다. 낯선 이름들 아래 마음이 조급해진다. 부족한 정보를 채우려 마른눈을 비비며 리뷰를 읽고, 별점을 비교하며, 방문 후 만족감까지 예측해 본다. 집요하게 데이터를 수집하다 보면 어느새 뜨겁게 달아오른 핸드폰이 경고음을 뱉어낸다. 여행에 대한 설렘은 후끈한 열기처럼 증발해 버리고 어느덧 돌처럼 남은 ‘즐거운 여행’에 대한 의무감만 숙제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몇 년 전부터인가 한국에서는 MBTI가 유행처럼 번지더니 ‘나’를 설명하고, ‘너’를 이해하기 위한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새로운 친구와의 첫 만남, 소개팅, 심지어 회사 면접에서도 등장한다. 정보의 홍수 속 한정된 시간 안에 한 사람을 알아가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간단한 방법. 관련 서적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줄줄이 출간되었다. 매달 책거리에서 보내는 메일링 북레터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다.

열여섯 개의 틀로 사람을 나눈다는 이론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막상 그 설명들을 읽으면 이상하리만큼 귀가 솔깃해진다. 좀처럼 다툴 일이 없는 남편이지만, 무언가를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는 유독 무관심한 태도에 불만을 품곤 했던 내가, 남편이 P(계획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타입)라는 MBTI 결과를 보고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다. 아,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었구나. 나와의 시간이 기대되지 않아서가 아니었구나, 하고 스스로 납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이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문자 그대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에 더 가깝다.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테고, 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도 없지만, 나와는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고 인정하며 존중할 수는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진정한 수용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를 완벽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걸까?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타인과의 관계는 훨씬 더 유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첫걸음이자,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이며,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를 목표일 것이다. 나는 메모장을 닫고 가방을 정리하며 생각한다. 뭉툭한 얼굴로 묵묵히 계획을 듣고 있는 남편의 마음을 내 기준으로만 재단하지 말아야지. 설렘을 갉아먹는 계획을 세우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때로는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나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며 들여다봐야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선 길 위에서 맞닥뜨릴 순간들이 계획을 초월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여행의 진짜 설렘은, 그 예측할 수 없는 여백 속에서 피어나는 것 아닐까.